[인터뷰] 경복궁서측에서의 삶의 역사 - 민병완 "해방부터 전쟁까지 이 곳에서 겪었어요"

경복궁서측 도시재생지원센터 김 승인 2022.01.10 17:57 의견 0

<경복궁서측 생활문화사>에서는 경복궁서측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한다. 경복궁서측에서 태어나, 아직까지 사직동에서 살고 있는 민병완 선생님을 만나 보았다.

경복궁서측에서 언제부터 거주하셨나요?

태어난 데가 여기예요. 다른 데도 아니고 옥인동이예요. 집도 바로 통인시장 건너편이었고. 육남매였어요, 누이 하고 나하고, 미국에 있는 여동생 하나. 셋만 남았어. 여기 송석원길이라고 하죠?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내가 세 살 때입니다. 이게 송석원 대문이에요. 대지 자체가 할아버지 집이었습니다.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할아버지가 누구냐 하면, 민영익 씨라고 아세요?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옛날 신문에 난 이 분이에요. 대사 자격으로 최초로 미국을 간 분이 할아버지였어요.

어린 시절에는 경복궁서측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셨나요?

일제강점기에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주로 놀던 데가 동네하고, 인왕산 올라가서 많이 놀았습니다. 미끄럼바위라고 있었어요. 거기서 미끄럼도 타고 팽이치기, 딱지치기 많이 했죠.

당시 동네 풍경은 어땠나요?

수성동 계곡에 집들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 위에 다리가 하나 있죠? 다리 건너서 누상동으로 올라가는 길에 한옥이 양쪽으로 쭉 있었어요. 그리고 누상동에는 일본식 가옥들이 있었어요. 누하동 쪽에는 초가집 동네가 있었어요. 해방 직후 누상동 옥인동 이쪽으로 밤 되면 늑대들이 돌아다녔어요. 야생이기 때문에 밤에는 잘 안 나갔지. 인왕산이 명산이라고 해서 국가에서도 굉장히 보호를 했어요. 꼭대기 올라가면 물이 고여가지고 거기서 목욕하고 애들 놀고 그랬어요. 인왕산 쳐다보면 바위가 절벽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 밑에가 그래요. 그리고 절벽 거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글자를 새겼어요. 사람이 글자 획 속에 들어가서 누울 수 있을 정도예요.

국민학교 시절 어떤 기억이 있으신가요?

국민학교도 시험 봐서 들어갔어요. 예를 들어서 모자를 가져다 놓고 이게 일본 말로 뭐냐, 연필 가져다 놓고 이게 뭐냐. 이걸 일본 말로 해야 돼. 제가 청운국민학교 다닐때도 천황 글씨를 가져다가 집 모양으로 지어서 거기다 모셔 놨어요. 우리가 등교할 때 거기 절하고, 나올 때 거기 절하고. 아침 조회 때는 선생이 하얀 장갑 끼고 나와서 일왕의 글자를 읽습니다. 그럼 우리는 따라서 읽어요. 국민학교 1학년이 뭘 알겠습니까. 한국어 이름도 일본말로 바꾸라고 하고. 이름이 민병완인데, 이걸 그대로 일본말로 읽었죠. 빈헤이깡이라고. 그 정도로 일본 사람들 밑에서... (웃음) 그렇게 지냈습니다.

해방 이후의 삶은 어떠셨나요?

해방되고 나서 내가 누상동으로 이사갔어요. (집 내부를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이렇게 집이 컸어요. 이걸 아직 기억하세요? 그럼요. 방이 여섯 개예요. 온돌 방은 세 개고, 다다미 방이라고 일본식 방이에요 이게. 응접실이라고 손님 맞는 방도 있었고. 다다미방에는 코타츠라는 게 있었는데 화로에 불 피워서 이불을 뒤집어 써요. 그 안에 다리 넣고,,, 그리고 전부 다 유리문으로 되어 있었어요. 일본식 집이 이런 식입니다. 한참 세월이 지났는데도 기억하시는 거 보니까 선생님 거기 사실 때 좋은 추억이 많으셨나 봐요. 어유, 그럼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부친 성함이 민위식인데. 종로구 선거위원장을 지냈고 민족청년단 단장을 지냈어요. 선거 때 전쟁이나 마찬가지예요. 깡통에다 수류탄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 집에 테러를 하러 오기도 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고 우리 집을. 그것 때문에 아버지도 굉장히 애를 많이 쓰셨죠.

6.25 전쟁 때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국민학교 5학년 때 6.25 전쟁이 났어요. 저 누상동 위쪽 동네에 땅만 있었어요, 거기다가 하꼬방(판잣집)을 지은 거야. 누상동 판잣집 안에서 미군 보급품 중에 레이션 박스라는 게 있었어요, 그걸 먹었지. 우리도 전쟁 난 지 몰랐어요. 서울 사셨는데도 모르셨어요? 그럼 몰랐지. 그러더니 며칠 있다가 인민군들이 들이닥치고 그랬죠. 아버지를 잡으러 돌아다녔어요. 인민군이 들어와서는 인민재판이라는 게 있어요. 동네 사람들이 재판하는 식으로 해서 그 자리에서 때려 죽이고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도망 간 거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민병완 선생님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해운회사의 기관장으로 근무하며 잠시 경복궁서측을 떠나셨다고 한다.

경복궁 서측에는 언제 돌아오셨나요? 그리고 이전과 변화한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사직동에 온 지가 30년이 넘어. 여기 옥인동이나 누상동 일대는 굉장히 많이 바뀐 거고,. 그리고 인왕산부터 청계천까지 흐르던 개천이 있었어요. 통인시장 정자 있는 그쪽으로. 그 전에는 인왕산에 물이 굉장히 많았다고. 근데 스카이웨이 있잖아. 그게 생기고 나서는 수맥이 끊긴 것 같아. 금천교시장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지금 버스 다니는 길 있잖아요, 그것이 버스가 다니는 길이 아니라 그게 전부 시장바닥이었어요. 그 다음 길 있죠? 경복궁 옆으로 가는. 옛날에는 그리로 전차가 다녔어요. 청와대 입구 거기가 전차 종점이었어요.

인터뷰하시면서 느끼신 소감 부탁드릴게요.

생각해주시고 찾아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내가 평생에 생활한 것을 들려드린 것 밖에 없는데. 내 평생에 생애가 이렇게 지나온 것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해요. 그리고 우리 자식들, 집사람, 가족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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