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계동 경상이발관 이발사 박순표

구암소계통합센터 권형수 승인 2021.02.22 20:56 의견 0

낮은 담벼락, 어린아이도 앞꿈치 들면 훤히 보이는 나이 든 주택과 초록색 카운티 마을버스가 오가는 지그재그 골목길 사이

네온사인 대신 페인트로 반듯이 쓴, 지금은 바랜 간판과 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거걱 소릴 내는 알루미늄 샤시

그리고,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이발등을 통해 현재도 운영 중이라는 것을 아는, 시간이 머무른 이발관 그곳에서, 구순의 이발사가 들려준 이야길 전하고자 합니다.

경남 창원시 의창구 소계동 700-14번지에 위치한 경상이발관(사진촬영 : 권형수)


Q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경상이발관 운영하는, 금년 90살인 박순표요.

Q2. 이발사라는 직업을 어떻게 선택하시게 되셨나요?

해방되고 난 이후에 학교 다니려고.

일본에서 학교를 나오긴 했지만, 동생들이 초등학교를 못 가는 거야. 그때는 내가 열여섯이었으니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워낙 생활이 어려워서 전라북도 고창에서 머슴살이를 6개월 했지, 근데 아무래도 그게 나한테 안 맞아.

그때 우리 큰형에게 얘기한 거라, 공부만 할 수만 있다면 일단 어디라도 한 번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 하니깐, 이발소 가겠냐고 하더라고, 사람 쓴다고.

하동에서 시다바리(보조) 생활하면서 공민학교(1) 다니면서, 동생들 초등학교 보내고, 어찌 됐든 (동생들) 학교는 마쳐야 될 거 아니야, 원하는 직업은 아니었었지.

6.25가 열여덟 살 때 일어나서, 피난 다니면서 그때 우리 식구가 10명 됐는데 이 이발 갖고 생계를 유지해 나갔지, 그러다 19살 때 영장이 나온 거라, 징집 대상자에 해당 안 되는데도.

한 달 집에 있다가 그 이튿날 뽑혀서 포항에서 대기하고, 제주도 가서 훈련 마치고 11월에 포병으로 나갔지, 한창 전쟁이 심할 때 군인들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할 때, 그런 생활을 한 3년 하다가 제대했어.

그런데 사회생활 나와보니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더라고, 그래서 이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거라.

(1) 초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취학연령을 초과한 자에 대하여 국민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 설치된 학교.

Q3. 인터뷰 중에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셨다고 하셨는데, 일본에서 태어난 신거예요?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지. 내가 열네 살 때 해방이 돼서 한국으로 왔어.

한국으로 오면서 하동으로 바로 갔는데,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 그런데 신기한 게 일본에서 태어났고 공부해서도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 한 번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네.

어릴 때 쓰던 일본말 몇 가지가 기억나, 근데 이제는 많이 잊어버렸어. 가타카나, 히라가나(2)가 기억나긴 나.

지금도 책으로 보려면 보는데 이제는 워낙 안 쓰니깐 어느 정도 듣기는 들어도 이제는 잘 안돼, 말도 잘 안 되고. 지금도 배우면 될 것 같긴 해.

(2) 일본어 문자

Q4. 소계동은 어떻게 정착하시게 된 건가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이 지역으로 왔지.

지금부터 한 45년 전이니깐, 그때 내가 40대 초반이었을 거야. 여기 경상고등학교 개교 당시에 우리 큰아들이 여기에 시험 치고 된 거라.

그래서 안사람이 지금 이 자릴 보고 와선 학교 근처의 터를 산 거야, 나는 보지도 않았고.

이삿짐 갖고 오니깐, 아주 촌구석인데 나한테는 무용지물이라, 영업해야 하는데, 순전히 촌이고, 집도 많이 없으니깐 막연했지.

지금은 위치가 좋지마는, 옛날엔 이 집이 제일 꼴등이라, 위에 사람은 없고 전부 밭이었거든.

그땐 학교 본관도 없고 부속건물, 지금 식당하고 교육관이 있는 데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무리 직업이 있어도 생활이 힘드니깐, 본관 짓는데 노동하러 다니는 거라, 그것도 몇 달 못했지. 하여튼 그러다 정착이 된 거지.

경상이발관에서 박순표 이발사(사진촬영 : 권형수)


Q5. 이발소 운영하시면서 힘든 일은 없으셨나요?

딱히 힘든 일, 그런 건 없었어. 내가 크리스천이거든, 믿음을 가지면서 살았지.

그때는 밑에 아이가 넷이고 하니 생활에 어려움은 있어도 어떻게 하든 간에 남한테 빌리는 것 없이 한 3년간 노동도 하면서, 오막살이 하다 빛을 내 집을 지었지.

생활엔 아무런 후회가 없어, 그래도 여기가 내 집이고 이게 내 직업이니깐. 그리고 내가 아주 건강해, 아픈 데가 없어. 그래서 아직까지 이 직업을 하고 하는 거지.

남한테 구애도 안 받고 내 노력만 있으면 내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깐, 후회는 없어 오히려 잘했다고 생각해.

내가 이런 직업을 안 가졌으면 이렇게 활동도 못 했거니, 사회생활도 못 하고 봉사활동도 못 하고, 내가 이 나이에 무료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게 그게 즐거운 거라.

(코로나 이전까지 박순표 이발사는 지역 요양원을 한 달에 몇 차례씩 방문하며 꾸준히 이발 봉사를 해오셨다)

박순표 이발사가 봉사활동으로 받은 감사패(사진촬영 : 권형수)


Q6. 경상이발관을 배경으로 영화 촬영도 했다는데

아 그래 기억나, 배우들이 와서 촬영했지, 장소만 빌려줬어, 배경으로 쓰라고.

그 제작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구암초등학교(3) 나왔다고 하더라고, 구암초등학교 나왔으니 어느 정도 이 지역을 아는 거라, 90년대(영화 배경) 그 옛날 풍경이 필요하니깐,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준 거지.

(3) 소계동 인근 초등학교, 참고로 영화의 제목은 '뜨거운 피', 영화 배경은 가상의 동네 '구암'을 배경, 신기하게도 소계동과 인접한 동네인 '구암동'과 명칭이 같다.

Q7. 도시재생에 대해 아시나요?

그건 전혀 몰랐지, 근데 여기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 도시는 못돼도 말이야.

70년대에 지어진 집이 몇 채 그대로 있긴 해. 옛날 그대로 집은 많이 없어.

여긴 이사 온 사람들이 새로 집을 지은 거 말고는 크게 변한 거는 없지, 내가 이사 올 당시 있던 이웃 사람 세상 다 떠나고 없는 것 말고.

Q8. 소계동에 오래 사시면서 개선하였으면 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런 생각은 안 가져봤어, 좋은 점뿐이 없어, 여기가 사람 살기 좋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있고 체육공원, 놀이터도 있고 산책하기도 좋고, 공기도 좋아.

여러모로 좋은 면만 있지, 나쁜 면은 없어. 마을버스가 수시로 다니니깐 이동도 편해, 여기는 사람 살만한데야, 좋은 면만 있지, 나쁜 면은 못 찾아.

Q9. 예전만치 소계동에 젊은이가 많이 없는데

여기는 기업체가 없으니깐 젊은 사람이 없지, 전에는 젊은 사람들이 와서 이발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타지로 다 나갔거든. 타지로 가고 그러니깐, 내가 아는 젊은이는 없어. 지금은 학생들이 안 와, 미장원을 가지 이발소를 왜 와.

이따금 (경상고 졸업생이) 찾아오긴 하지, 이발소는 그대로 있으니깐, 40년이나 그대로 제 자리에 있으니깐, 우리 큰아들이 벌써 64살이니깐, 예전에 학교 다니던 아이들이 제 아이들 데리고 찾아와.

그래서 이발소 경영이 안 돼도 아직도 운영해, 오는 손님이 있으니깐, 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이라도 찾아오니깐.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는 잘 정돈된 경상이발관 내부(사진촬영 : 권형수)

Q10. 가족들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신가요?

크게 하고 싶은 말 없어, 바르게 살아라, 봉사해라, 하느님 잘 섬겨라.

부자 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건강해라.

Q11. 자녀들에 대해 자랑할 게 있으시다면?

우리 아이들은 꼬박꼬박 모여서 같이 놀러 다니고 그래. 아들, 딸이랑 화목하니깐 즐거워.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물어보니깐 주변에 그렇게 하는 친구가 없다 그래, 부모가 나이가 많아 건강이 안 좋으니까, 같이 못 가기도 하고, 부담도 되니깐.

그래서 내 아이들 친구들이 부럽다고 그래, 자기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부모들이 안된다고 하니깐 말이야. 한쪽이 된다 해도 한쪽이 안 되면 안 되는 거야. 우리 가족한테는 그런 게 없어. 그런 거 보면 너무 감사해, 이게 하나님의 은혜지.

그리고 우리 안사람이 굉장히 봉사를 많이 했어, 참 봉사 많이 했다.

어려운 사람 보이면 점심도 먹이고, 손님 대접을 잘했지, 그걸 아이들이 많이 본 거라. 그런 걸 아이들이 보고 그대로 하는 거라, 또 자식들이 그걸 손자들한테 보여주고, 그러니깐 부모한테 잘하는 거라.

Q12. 본인한테 하고 싶은 말

나는 복된 사람이다. 나는 복 많은 사람이다. 왜, 내 지체의 여러 연약한 부분이 생겨도 크게 아픈 게 없다. 양다리에 인공관절 수술을 했는지 벌써 10년이 됐어도 한 번도 아린 적이 없어, 내 연약한 부분이 치료한 다음 아픈 적 없다는 것. 그래서 나 자신에게 감사할 뿐.

박순표 이발사의 손(사진촬영 : 권형수)


Q13. 박순표 이발사에게 경상이발관이란?

내 집이고, 내 쉼터고 내 서재고, 여기서 하루 시간을 보내. 나하고 (경상이발관) 같이 늙은 거라, 집하고 사람이 같이 늙었지.

아침 여덟 시에 (경상이발관) 나와 저녁 여섯 시 되면 집에 들어가, 여기서 성경 보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사람들 오면 대하고 그게 즐거워.

그리고 내가 직업을 잘 배웠다는 건 이것 가지고 생활하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집을 장만하고 했으니깐.

나고야에서 태어나 소계동에 이르기까지, 욕심 없이 본인의 터전을 가꾸며 소박한 삶을 살아온 박순표 이발사.

반세기 가까운 인생을 그와 함께 보낸 경상이발관에서의 인터뷰는 "오래된 책은 다 사라지고 신간밖에 남지 않은 도시의 서고"(MBC 경남 다큐멘터리 '낡은 집' 中)에서 겨우 발견한 고전과도 같았습니다.

재건축과 재개발 속 재발견과 재해석의 공간이 될 수 있는 오래된 집, 오래된 공간은 서사와 역사가 직조된 공간으로 단순히 영화와 같은 창작의 배경을 넘어 상상력과 창의력이 깃든 공간, 다양성의 원전이 되며 도시를 재생케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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