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류동의 문인들 - 옥계시사(玉溪詩社)

사학도(史學徒) 인턴 김주희의 경복궁서측 역사이야기

경복궁서측 도시재생지원센터 김 승인 2022.01.25 02:57 의견 0

사학도(史學徒) 인턴 김주희의 경복궁서측 역사 이야기

옥류동의 문인들, 옥계시사(玉溪詩社)

김주희 인턴

위항문학이란 중세적 사회질서가 해체되어 가던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조선 후기에 소위 ‘위항인’이라고 하는 특수한 사회신분계층에 의해 창작되어진 문학을 일컫는 용어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체제의 동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실학사상의 대두 등 중세적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사회는 근대로 이행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문학을 비롯한 회화, 음악, 연극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민중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민중예술운동을 이끌어냈다.

위항인이란 위항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양반 사대부와 같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인 상인, 천인 사이에 위치하여 ‘중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인계층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의관, 역관, 화원, 산사 등의 전문직업을 세습하며 양반 사대부 문화와 구분되는 그들만의 개성있는 중인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문예활동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이 인왕산 아래 옥류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위항문학운동이었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누각골(지금의 누상동) 쪽과 옥류동(지금의 옥인동) 쪽에서 각기 흘러 내리다가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에서 만나게 되는데, 깊은 산 속에 옥같이 맑게 흐르는 이 시냇물을 “옥계(玉溪)”라고 불렀다. 위항문학운동을 이끌었던 옥계시사(玉溪詩社)는 바로 이 곳에서 결성되었다.

인왕산 옛 물길 합류 위치(옥인동 47번지 일대)


옥계시사는 맹주인 천수경(千壽慶)을 비롯하여 장혼(張混), 김낙서(金洛書), 왕태(王太) 등 13명의 시인들이 1786년 7월 16일 옥류동 청풍정사(靑楓精舍)에 모여 수계(修禊)를 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나이에 따라 서차(序次)를 정하고, 시사의 범례(凡例)를 정하였다.

이들은 주로 인왕산 언저리에서 1750년-1760년대에 태어나 글공부를 같이 하던 20대의 젊은 시인들이었다. 옥계시사는 이후 천수경이 옥류동으로 이사와 소나무 숲과 바윗가에 초가집을 지어 그 이름을 송석원(松石園)이라 하면서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송석원은 그 위치를 정확하게 비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인근으로 추정된다. 옥인동 24-2에는 송석원 터를 표시한 표석이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송석원 표석 위치
송석원 터 표석(옥인동 24-2)



옥계시사는 시구와 그림을 모아 시화첩을 만들기도 했다. 여기서 송월헌 임득명이 옥류동의 풍경을 노래한 시를 소개한다.

산안개 구름 그림자 맑고 한가한데

물을 좋아하는 인정 산 또한 좋아한다네

옥류계 위의 집에 높이 누워 있으려니

개고 흐리는 세상사 모두

술취하고 깨는 사이에 부치네

이 시에는 산안개 끼고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아름다운 옥류계 높은 곳에 있는 집에서 산과 물을 즐기며 술에 취해 잡다한 세상일을 잊고 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렇듯 경치가 빼어난 송석원이 위항시인들의 모임터가 되면서 옥계사 동인(同人)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천수경의 집이 좁을 정도가 되자, 위항시인 수백명이 일년에 두 차례씩 문통(文通)을 보내 연못에 모여 시를 지었다. 이 모임을 바로 백전(白戰)이라 하였는데 시를 아는 사람으로 이에 참가하지 못하는 이는 부끄럽게 여겼다 하는 것을 보아 옥계시사가 당시 문학에 있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수경의 송석원은 30여년 동안 위항시인들의 모임터로 활용되었지만 1818년 천수경이 세상을 떠나자 송석원에서의 모임은 줄어들었다. 이후 송석원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장동 김씨 가문으로 편입되었다.

송석원 각자, 김영상 제공(1959)


당시 시화첩에 그려졌던 옥계시사 모임터의 흔적은 현재 인왕산 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옥류천 또한 복개되어 그 위치를 정확히 확정할 수 없다. 이인문의 그림을 보면 옥류천 건너편에 송석원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데, 이 글씨는 이들의 후원자였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써 준 것이다.

김정희의 송석원 각자는 1959년 김영상이 찍은 사진을 마지막으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개발 과정에서 훼손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2019년 개발 과정에서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옥류동 각자가 발견되기도 해 아직 어딘가에 김정희 글씨가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정옥자, 「정조대 옥계시사의 결사와 진경시화」, 『한국학보』28(4), 2002.

천병식, 「위항문학의 형성과 전개」, 『인문논총』3(1), 1992.

허경진, 「옥계사연구」, 『어문학연구』2(1), 1992.

허경진, 「인왕산에서 활동한 위항시인들의 모임터 변천사」, 『서울학연구』13,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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